역사와 문화

  • 검문관
  • 지명의 유래 삼국시기 촉한의 승상인 제갈량이 한덕현(汉德县, 지금의 한양진/汉阳镇)에 “대검산과 소검산에 이르는 30리 길에 험한 산세가 연이어져 매우 위험하다 (大剑至小剑隘束之路三十里,连山绝险)” 라고 하며 이곳에 돌을 깎아 잔도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대검산의 양쪽 절벽사이에 돌을 쌓아 문을 만들어 각위를 설치하고 군사를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며 이를 검각(剑阁) 또는 검각관(剑阁关)이라 불렀습니다. 당나라 이후부터 검문관이라 불리기 시작하였으며 역사적 가치가 있는 보기 드문 유적입니다.
검문촉도- 삼국 역사가 살아 숨쉬다.
  • 검문관
  • 검문관
검문촉도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둘러싸인 험준한 촉나라의 고촉도(古蜀道)이며 3천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최초의 국가급 풍경명승지로 불리는 검문촉도는 검문관을 중심으로 하여 북쪽으로는 섬서녕강(陕西宁强)을 시작으로 남쪽 성도까지 전체 길이가 450km에 이릅니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검문촉도는 검문관을 중심으로 유비, 방통, 강유, 제갈량 등 삼국지 영웅들이 남긴 유적들뿐만 아니라 삼성퇴박물관, 덕양문묘, 소화고성, 칠곡산대묘, 황택사, 천불애 등 중요 문물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 한 토막 중원에서 사천성을 통하는 유일한 통로이자 고도(古道)이며 당나라 시인 이백이 <촉도난>에서 “촉으로 가는 길,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어렵구나(蜀道之难,难于上青天)”라는 구절로 세상에 이름을 알렸습니다.
검문관 – 천혜의 요새
  • 검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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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문관은 북쪽 위나라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세워졌으며 제갈량은 검문관을 지나 6차례 북벌을 하게 되며 이곳에 주둔하여 양식을 비축하고 군사를 주둔시켜 훈련하게 하였습니다. 대검산 북동쪽에 위치한 협곡저지대에 만들어진 검문관은 이 길이 아니면 수백 킬로미터를 우회해야 하는 까닭에 전략적 요충지이자 천혜의 요새라 불립니다. 이야기 한 토막 당대 시인 이백은 <촉도난>에서 ‘한 사람이 관문을 지키면 만 사람이 와도 뚫지 못한다(一夫当关,万夫莫开).’라고 극찬했고 또한 옛말 중에 “검문관을 함락하면 사천성을 얻는다(打下剑门关,犹如得四川)”라는 말이 있는데 이 모두 검문관의 중요성을 의미합니다.
공명입관(孔明立关), 강유수관(姜维守关) – 제갈공명이 세우고 강유가 지키다.
  • 검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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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 승상으로 있을 당시 대검산과 소검산 사이로 30리 정도의 각도 있었는데 여기에 잔도를만들었고 대검산 양쪽의 절벽이 마주보는 곳에 문을 만들어 각위(阁尉)를 설치하고 군사를 두어 이를 지키게 하였습니다. 강유가 여러차례 북벌을 시도할 당시 바로 이 검각을 통과하였고 촉나라 강유의 3만대군이 위나라 종회(钟会)의 10만 대군에 맞서 싸워 검문관을 지켰다고 합니다. 이야기 한 토막 삼국시대에 촉나라 승상 제갈량이 군사를 이끌고 북벌에 나섰고 대검산을 지나 군봉이 웅장하고 산세가 험하여 진군이 어렵게 되자 군사들을 시켜 바위를 뚫고 잔도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검문관은 촉한으로 통하는 관문이자 촉한의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서기263년, 위나라 종회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검문관을 향해 돌진하였고 촉나라 강유가 3만대군으로 3개월간 방어하여 검문관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이후 위나라는 검문관을 피해 음평 지역을 뚫고 계곡에 다리를 놓아 전진하여 급습에 성공하게 되며 촉나라는 멸망하고 강유도 검문관을 지키다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때문에 이곳 사람들은 그를 이 지역의 ‘수호신’으로 여긴다고 합니다.